좋은 글·그림
ㆍ작성자 정하웅
ㆍ작성일 2017-09-08 (금) 09:23
ㆍ분 류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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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달에 있었던 가족묘 이야기
                                             
2017년 閏5月(6월24일~7월22일)을 맞아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마석) 모란공원에 家族納骨墓를 조성했다. 예로부터 윤달은 썩은 달이라 하여 “이때는 사람들이 불경스러운 행동을 해도 神의 罰을 피할 수 있다”고 전해지고 있어 이달에 맞춰 일을 추진한 것이다.
모란공원의 ‘가 지구’에 할머니 묘소가 있고 그 바로 앞에 합장된 부모님의 묘소가 있다. 또한 이곳과 한참 떨어진 ‘모란 3지구’에 형님과 내가 오래전에 예약해 둔 묘 터가 나란히 붙어있다.
이렇게 흩어져 있는 묘소들을 한 곳에 모으기도 하거니와 그렇게 되면 묘소참배가 쉬워지면서 관리비용도 훨씬 줄어들고, 단단한 石材로 만들어 지기 때문에 견고하면서 보기에도 좋다. 또한, 묘소에 잔디를 입힐 필요도 없고 나아가서는 매장문화가 화장 문화로 바뀌어가는 시대적 요구에도 부합된다고 본다.
현재 우리나라의 화장 문화는 점점 확대돼 가고 있고 그 방법도 다양해 졌다. 유골을 항아리에 담아 납골당시설에 안치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일정규모의 납골 묘를 조성하여 유골을 안치하거나 매장을 하는 방법도 있다. 아니면 수목 장을 하거나 강물에 뿌리는 경우도 있다. 금번에 우리가 한 것은 미리 예약해 둔 자리에 유골 12구가 매장될 수 있는 크기로 납골 묘를 만들었다. 4代가 들어 갈 수 있는 가족묘인 셈이다. 이 방법이 자연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방법으로써 가장 좋을 것 같았다.

매장 묘를 납골 묘로 전환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의지와 결단력이었다. 집안에서 장손인 형님이 몇 년 전부터 할머님과 부모님 묘를 납골 묘로 바꾸어야겠다는 결심을 하셨고 금년윤달이 오기만을 기다렸던 것이다. 이에 부응하여 나 또한 절차와 방법, 소요비용 등을 묘원관리사무소를 통해 미리 알아보기도 했다. 관리사무소에서는 “이사회에서 결정이 나야 된다”고 하면서 개략적인 절차와 소요되는 비용을 일러 주었다. 비용이 천삼·사백만원 정도로 만만치가 않았다.
형편이 여의치 않아 다음번 윤달(2020년 윤4월)에 하면 어떻겠느냐는 형수님의 제안도 있었지만 형님의 결심은 확고했다. 형님은 결정만 하고 전적으로 내가 맡아서 추진하기로 했다. 형수님이 점보는 집에 가서 날을 보았는데 7월 3일(윤 5월 10일)이 좋다고 하여 이날을 작업일로 잡았다.
5월24일 화도읍사무소에 가서 개장신고를 하면서부터 일은 시작되었다. 당초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던 묘 전환(매장묘→납골묘) 문제는 돈(560만원)만 내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가장 신경을 써야 할 일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곧 화장시설을 예약하는 일이었다. 화장시설예약은 보통 때는 15일전에 했으나 윤달만큼은 한 달 전에 해야 한다고 한다. 화장시설현황을 보니 모란공원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곳이 벽제(서울시립승화원)와 성남(영생관리사업소), 춘천(안식원)이었다. 나는 벽제와 성남은 경쟁이 심할 것 같아 비교적 교통이 좋고 덜 복잡한 춘천을 택했다.

인터넷으로만 신청을 받는다고 하여 이를 관장하는 보건복지부의 「e하늘장사정보」에 신청방법에 관해 물어봤다. 7월 3일에 화장을 한다면 한 달 전인 6월 3일 00시부터 신청을 받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노인은 하기 힘든 일이니 옆에 젊은 사람 없느냐”고 묻는다. 없다고 하자 “신청할 때는 경쟁이 심하기 때문에 순발력이 있는 젊은 사람이 했으면 좋겠다”고 강조 했다. 인터넷이라면 어느 정도 자신이 있는 나였지만 그 얘길 듣는 순간 두려움이 앞섰다. 더구나 할머니와 부모님(합장)을 각각 신청해야 되니 물리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분산하여 신청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할머니는 족하에게 부탁을 했다. 소정의 신청서식이 있어 기록사항들을 미리 체크하는 등 사전연습이 필요 했다.
드디어 예약신청을 하는 날이 돌아왔다. 6월 2일 자정 30분전에 「e하늘장사정보」 홈페이지를 열었다. 미리 기록사항들을 작성했다. 족하에게도 연락을 하여 ‘땡’ 하자마자 버튼을 눌리자며 다짐을 했다. 1초라도 늦으면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컴퓨터에 나타나는 시간을 체크해가면서 눌러야 했다. 드디어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57분 - 58분 - 59분 - 땡’ 바로 버튼을 눌렀다. 어떨 결에 누르긴 했으나 잘 접속됐는지 의문이 들었다. 당첨(접수여부)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 600얼마에서 시작되더니 시간이 흐를수록 450 - 320- 180 - 75 - 33 식으로 점점 줄어든다. 드디어 ‘접수 되었습니다’는 자막이 떴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확정되기까지는 무려 2분여 시간이 소요되었다.
이날 하루 24시간 동안 받도록 돼 있는 예약이 단 1초 만에 끝이 난 것이다.
마치 달리기선수가 신호가 울리자마자 스타트하는 식으로 민첩한 행동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세상에 이런 일도 다 있구나” 생각하면서 무엇보다 젊은 사람들과 경쟁하여 이겼다는 자부심이 기쁨을 더해 주었다.

족하는 어찌되었을까. 궁금하여 전화를 했더니 ‘저는 안 된 것 같아요’한다. “강원도 다른 곳에 미달된 곳이 있는지 알아보라” 했더니 머리가 아프다며 누워야겠다고 한다. ‘알았다’ 하고 즉시 인터넷을 통해 강원도 지역 화장시설예약상황을 살펴봤다. 인제(종합장묘센터)에 6개가 남아 있었다. 즉시 할머니 건을 인제에 접수시켰다.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이 “같은 날이긴 하나 춘천과 인제 두 곳으로 나눠지면 일처리가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곳으로 모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인터넷을 다시켰다. 인제에는 아직도 몇 개가 남아 있었다. 인제에 신청하기위해서는 춘천의 것을 먼저 취소시켜야 한다. 그 어렵게 성사된 것을 취소시키기에는 무척 아쉬움이 컸다. 취소시키는 서식작성에도 꽤 시간이 걸렸다. “춘천을 취소시키는 사이에 인제 것도 마감이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을 하면서도 과감하게 취소를 시켰다.
부모님 사망일자, 묘지주소 등 관련사항들을 신청서에 새로 작성하여 인제(종합장묘센터)에 신청을 했다. 접수됐음이 인터넷에 떴다. 직접전화로 인제에 확인을 했더니 새벽인데도 친절하게 접수가 됐다고 응대하면서 당일 오후1시에 개장신고증명서와 시설사용료를 지참해서 오면 된다고 했다. 인제는 시설사용료가 다른 곳에 비해 반값 정도로 낮았다. 어느새 새벽이 되었다. 늦은 시간이었으나 홀가분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금번 가족묘를 조성함에 있어 화장시설예약을 비롯하여 소요비용의 조달문제, 묘지개장 일을 전후한 장마폭우 등 많은 어려움이 있었건만 우리가 바라는 대로 아무런 낭패 없이 잘 치러졌다. 이는 저승에 계신 할머님과 부모님의 보살핌이 크셨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게 생각되는 것은 2003년 추석 때의 일이 떠오른다. 아버지가 2007년에 돌아가셨으니 돌아가시기 4년 전인 것 같다. 그해 추석을 전후하여 비가 많아 추석 일주일을 넘겨서 아버지와 형님내외분, 여동생들과 함께 할머니와 어머니묘소를 찾았다. 대다수의 묘소들이 추석을 보내면서 말끔히 손질돼 있었다. 그런데 웬일일까!  할머니와 어머니묘소는 관리한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꽤 재재한 흰 봉투하나가 어머니 상석위에 바람에 나부끼며 붙어 있었다. 봉투를 뜯어보니 묘원관리사무소에서 보낸 “묘원관리비독촉장”이었다. 형님은 그것을 보자 납부고지서를 받긴 했으나 바쁘게 지내다 보니 납부하는 것을 그만 놓쳤다고 했다. 산소에 독촉장을 붙여 놓은 관리사무소의 처사도 못마땅했거니와 남들이 보았을 때 부끄럽기도 하고, “집안에 무슨 일이 있기에 여기에 까지 독촉장이 붙여지고, 추석이 지나도 누구하나 찾아오지도 않나” 하고 염려했을 할머니와 어머니를 생각하니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아버지께서도 “어 그것 참”하시면서 몹시 침통해 하시는 표정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형님이 “어제 밤에 어머니 꿈을 꾸었는데 로또복권을 샀으면・・・” 했다. 그날 밤 늦게야 형수님을 통해 로또복권 한 장을 샀다고 한다. 바로 그 복권이 3등에 당첨되었다. 형님은 어머니께서 그 돈을 내리신 것이라고 하면서 310여만 원의 당첨금에서 세금을 떼고 240여만 원을 받았는데 그날로 즉시 묘소관리비(75만원)를 납부하고, 그래도 160여만 원이 남아 묘역에 새 잔디까지 입힌 일이 있었다. 이렇듯 이번 일에도 그 분들의 큰 은혜가 있었음이 분명하다고 본다.

새로 조성된 가족묘는 규모는 다소 작으나 아담하게 잘 만들어 졌다. 술과 포 등을 장만하여 형님내외분과 집사람, 여동생과 함께 새 가족묘를 참배했다. 형수님이 엎드려서 “화장을 하게 되어 어른들께 면목이 없다”며 눈시울을 붉히셨다. 형님은 돌아오는 길에 망우(忘憂)고개를 넘으면서 태조 이성계가 한 말 “於斯吾憂忘矣(어사오망우이/ 이제 시름을 잊겠다)"를 되새기며 이제 근심걱정을 덜게 되었다고 했다. 나 또한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이래 30여년을 수없이 이 고개를 넘나들었건만 이날처럼 마음이 개운한 적은 없었다.
1)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사직(社稷)의 기초를 세웠으나 사후의 명당을 찾지 못하였다. 이에 전국에 지관(地官)을 파견한 결과 동구릉의 건원릉 터를 만년유택(萬年幽宅)으로 지정한 후 중신 지관들과 함께 염암산 밑의 릉 터를 다시 한 번 살펴보고 명당임을 확인했다. 태조는 흡족한 마음으로 환궁하는 길에 현재의 망우산 고개위에 이르러 잠시 쉬면서 주위의 산천기세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건원릉 터를 바라보면서 배종(陪從)한 신하들에게 「아아, 이것으로써 오랫동안의 근심을 잊을 수 있게 되었노라」 고 했다. 그 이후부터 이 고개를 망우리 고개(근심을 잊은 고개)라고 하였다.  

21세기 근대화시대에 살아가면서도 기왕이면 좋으라고 윤달이니 점이니 하는 구시대적 풍습들을 동원하는 등 최선을 다했다. 이 일을 시작하고부터 “어른들께 혹시나 불경스러운 짓을 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했다. 할머니 묘소를 건드리기가 뭣하여 윗대로는 한 분 계신 고모님께 여쭈어봤다. 기꺼이 승낙해 주시면서 비용에 보태라며 돈(100만원)까지 보내주셨다. 일이 끝난 후에도 큰일을 했다고 하시면서 “이번 추석 때는 나도 함께 참배 해야겠다”고 하셨다. 주위 분들로부터도 “하기 어려운 일인데 애썼다”는 칭찬과 함께 많은 격려도 있었다. 금번 일을 치르는 동안 “혹시 꿈에 조상이 나타나 잘 못하는 짓이다”고 나무라는 우려도 가져봤지만 그러한 일은 생기지 않았다. 이 모든 것들을 좋은 징후로 받아들이고 싶다. 금번 가족묘 조성은 후손들을 위해서도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jijungh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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